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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화활동

Our activities

이석창 대표가 독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7년 6월 건국대학교 임학과 2학년을 마치고 전투경찰대에 입대하여 이듬해 11월 독도경비대 파견근무가 계가가 되었다. 그때 마주친 독도의 모습은 나무 몇 그루 없는 초라하고, 춥고, 외로운 무인도였다.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면서 문뜩 떠올린 것은 이대로 보초만 서면서 기약 없는 시간을 때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 황량한 섬에 나무를 심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은사인 건국대 조태환 교수 (당시 52세)에게 독도에 이끼가 아닌 '나무옷'을 입혀보겠다는 의사로 편지로 알리고, 그의 기술지도를 받아 1979년 2월까지 4개월 동안 수목식재를 위한 현지조사를 끝냈다. 조사결과 확인된 독도의 식물상과 자연환경 상태를 보면, 1)수목종은 5종으로 해송, 섬괴불나무(울룽도 자생한국특산종), 아카시아가 각각 2그루씩 동도에 있으며, 개머루 10여 그루와 사철나무 20여 그루가 동도의 바위틈과 화구호 주위, 서도의 정상부근에 자생 2)초본식물은 해국, 참나리 등 60여정 3)연평균 기온은 12℃ 가량 (겨울 2.5℃, 여름 21℃ 내외) 4)강수량은 연 1,400mm 5) 풍속은 평군초속 12m로 겨울에는 사람이 서 있기 어려울 정도의 강풍.


자연환경조사를 끝냈지만 식재의 어려운 점이 곧 드러났다. 강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소금기가 나무에 달라붙어 식물세포의 원형질을 분리(파괴)시켜 말라 죽기 쉬운데다가 초소 12m의 강풍은 묘묙이 활착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 게다가 식목적기인 3월말에서 4월초순까지의 강수량이 적고 흙마저 부족해 수분이 쉽게 증발하거나 바다로 흘러 가 버리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 는 없었다. 대비책을 마련한 뒤 묘묙을 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자신이 소속된 울릉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했고, 울릉경찰서는 울릉군청에 부탁하여 해성 1,000그루를 얻어줬다. 이번에는 묘목 가식과 운반이 문제였다. 다행히 처음부터 이석창 전경을 도와온 울릉경찰서 황보선 경장 (당시 35세)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왔다. 자신이 가마니에 흙을 넣어 가식을 거의 마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전갈이었다. 3월말, 독도에 도착한 묘목들은 황보 경장의 도움으로 일찍 가식이 돼 어느 정도 활찰력이 붙어 있었다.


4월 2일, 군청에서 분양받은 해송 1,000그루와 고향 서귀포에서 구입한 돈나무, 섬쥐똥나무, 다정큼나무 20그루를 비교적 토심이 양호한 장소를 골라 나무를 심었다. 전우들의 도움을 받으며 울릉도에서 가마니로 운반한 흙으로 붇돋아 주었고, 그루당 3개의 지주목을 세워 풍해에 대비했다. 염해를 피하기 위해 비닐봉지를 만들어 나무에 씌웠다. 파라핀이나 라놀린 (양털기름으로 초의 일종)을 흙에 뿌려 수분증발을 억제하는 한편 서도에 있는 물골에서 힘겹게 물을 길어 규칙적으로 관수를 했다.


나무를 심은 처음 한달은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루를 자고나면 연약한 묘목은 2-3그루씩 바람에 날려 뿌리째 뽑혀져 다시 심기를 반복했다. 수분 부족으로 말라 죽어가는 나무를 볼 때마다 자신의 혈관이 말라드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은사인 조교수에게 편지를 보내 지도를 받았다.


묘목이 활착하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3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무 1,020그루 중 700여 그루가 완전히 살아남았다. 한그루만 살아도 성공이라며 이 '무리한 도전'을 외면하던 주위 사람들은 '독도의 기적' 앞에 놓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해방 후 수십년 동안 당국이나 군민들이 나무심기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불모의 바위섬 독도에 푸른 옷 입히기를 성공시킨 것이었다.


그러부터 8개월 뒤 12월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를 두고 정든 독도를 떠났다. 한가지 걱정이 있었다. 섬에 방사돼 있는 토끼들이 부족한 수분을 섭취하기 위해 나무껍질을 갉아먹는 일 때문이었다. 나무에 가시철망을 씌워 토끼 접근을 막아줘야 하지만 20여만원의 비용이 없어 이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떠나 온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제대 이듬해인 1980년 4월 산림청. 경상북도 산림관 계자와 현지 확인을 했을 때는 300여 그루가 살아남아 자라고 있었다. '푸른독도 가꾸기'의 공로로 이석창 대표는 대학 4학년 때 산림청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우직스러우면서도 의지에 찬 한 임학도의 도전이 비로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 나무들도 아마 많이 자라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람이 많은데다가 토심은 없고 염분 피해도 심하고, 또 토끼들이 겨울에는 나무껍질을 자꾸 갉아 먹어버리니까요" (TOUR TODAY, 1996년 3월, 이석창 대표)


"그때의 나의 노력이 독도 가꾸기의 시발점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군 제대 후 몇 번 다시 나무를 심으려 시도하였지만 정부의 계획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독도 가꾸기는 단순이 나무를 심는다기보다 자연을 만든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독도의 천연성과 참재적 자연성을 고려해 녹화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생태환경을 만드는 게 푸른독도 가꾸기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간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과 함께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라일보, 2010년 4월 22일, 이석창 대표)